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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배경

 

18세기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제1신분(추기경,로마 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세금의 면세와 온갖 항락,쾌락을 누리며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인구의 약 98%를 자치하던 제3신분(평민,시민)은 쾌락과 항락에 빠져 사는 제1신분과 제2신분

그리고 무능한 프랑스 정부를 뒷받침 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느랴 프랑스 평민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가고 있었어.

 

그러다가 때마침 1775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을 상대로 미국의 독립 전쟁이 터지게 되는데

영국과 오랜 앙숙이던 프랑스 정부는

 

이 전투에서 미국이 이긴다면 영국이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의 독립을 지지해주면서 막대한 지출을 감행하여 미국을 도와주게됨.

 

하지만 이 과도한 지출 때문에 프랑스의 재정은 휘청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무리한 지출로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는데

 

프랑스 정부는 이 재정을 매꾸려고 제3신분(평민,시민)에게 전보다 더 부과되는 세금을 과중시켰고

이는 결국 루이 16세에 이르어 제3신분(평민,시민)을 중심으로 불만이 극에 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어.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이였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1732년 1월 20일~1802년 10월 30일)도 이 사정을 알아채고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려는 개혁안을 제시하였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특권계층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것을 요구하였고  프랑스 왕은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여 귀족 300명 성직자 300명 평민 6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 삼부회에서의 투표 방식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자 결국 삼부회는 결렬되고 맘.

 

이에 시민 대표단은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니스 코트의 서약을 하고

국민의회(1789년 6월 17일~1789년 7월 9일)를 조직하자

 

이에 프랑스 왕은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시민들의 움직임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 챈 프랑스 시민들은 혁명을 계획하고 혁명에 필요한 무기들을 탈취하기 위해 1789년 7월 14일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거야.

 


 

전개과정

 

1789년 7월 14일,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후로 프랑스는 커다란 혼란에 휩싸이는데  이 기세에 놀란 루이 16세는 결국 국정을 모두 국민의회에게 맡기게 됨.

 

이후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26일,귀족 라파예트가 기초한 17조로 구성 된 프랑스 인원 선언을 발표하는데 이때부터 국민의회가 법에 입각한 입법의회(1791년 10월 1일~1792년 9월 20일)로 바뀌게 됨.

 

하지만, 루이 16세와 그의 일가족들이 바렌이라는 지역으로 도주하려다가 붙잡힌 렌 도주 사건(1791년 6월 20일)으로 프랑스 왕은 그나마 남아있던 신뢰를 잃어버리면서 국민들은 왕을 배신자라고 여기며 왕을 튈트리 궁전에 감금시켰고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6세의 아내(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함께 군대를 보내 프랑스를 공격해.

 

이에 프랑스 혁명정부인 입법의회가 맞서면서 혁명전쟁(1792~1803)이 발발하게 되는거지.

 


 

하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은 프랑스 군은 전투마다 패했고 도주하려는 왕과 프랑스 내부의 급격한 혼란,그리고 외부 국가와의 전쟁등으로 프랑스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한편, 프랑스 내부의 혁명정부 안에서 정치가였던 마라(1743년~1793년)와 조르주 당통(1759년 10월 26일~1794년 4월 5일)을 중심으로한 과격파 자코뱅 당(1793년 6월~1794년 7월)이 득세하면서

 

이전의 혁명정부를 담당하던 온건파는 자코뱅 당에 의해 밀려나게 됨.

 

또한 자코뱅 당은 왕이 군사기밀을 빼돌렸다는 선동을 펼쳐 파리 군중의 분노를 유발하여 왕과 왕의 일가족들을 이제는 아예 감옥으로 가두어 버려.

 

이렇게 자코뱅 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두려움을 느낀 일부 프랑스 귀족들은 망명을 시도하지만 분노한 군중들에게 붙잡히게 되면서 이들을 닥치는대로 처형하는 등 혁명정부는 과격하게 변해버려.

 


 

이후 프랑스 군대가 발미 전투(1792년 9월 20일)에서 첫승리를 거둔 다음해  과격파 자코뱅 당에 의해 입법의회에서 

국민공회(1792년 9월 21일~1795년 10월 26일) 재구성된 새로운 의회는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사형시켜

 


 

이 사형 소식을 들은 온 유럽 왕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됨. 절대왕권의 상징이던 프랑스 왕이 군중들에 의해 처형을 당해버렸으니 말이지.

 

이에 위험을 느낀 프랑스의 주변국들은 프랑스를 적대시 하기 시작했고 일부 국가(네덜란드,스페인,오스트리아,프로이센)는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함.

 

프랑스 내부에서는 여왕이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을 당해.

 

 

 

 


 

왕도 여왕도 참 불쌍한게 아에 정치에 대해 모른다는 거지.

 

루이 16세는 가정적이 였어 특히 열쇠 덕후라서 왕이 아니였다면 열쇠를 만드는 평범한 사람이였지 않았을까 싶네..

 

루이 14세,15세가 재정을 못해서 결국 이 결과가 나오고 여왕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프랑스에 적응하며 살아가다 오해로 시민에겐 마녀가 되버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명한 말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

이 망언의 진실은 여왕이 말한적이 없다고해. 

 

 

둘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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